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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에게 고함
신소장품 특별전

동포에게 고함 - 안중근 옥중 유묵

Last Words to my Fellow Koreans : Ahn Junggeun's Calligraphies from prison

기 간 : 2017.03.23 [목] ~ 2017.06.18 [일]

장 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 관 람 료 : 무료
  • 관람시간 : 09:00 ~ 18:00
  • 수요일 및 토요일 오후 9시까지 야간개관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 관람문의 : 02-3703-9200

전시를 열며 (Opening Special Exhibition)

전시에 앞서 전시 개요를 소개합니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오로지 나라의 안위만을 걱정했던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지난 2016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안중근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유묵을 새로이 입수 하였다.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와 ‘지사인인 살신성인(志 士仁人 殺身成仁)’ 두 점으로, 모두 일본에 보관되어 있다가 백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3월 26일 안중근의사 순국일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고국으로 돌아온 안의사의 유묵을 국민들에게 선보이고자 이번 특별전을 마련하였다. 또한 2012년부터 안중근의사숭모회로부터 기탁받아 보관하고 있는 안중근 유묵 일부도 함께 선보인다. 안의사의 유묵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뒤 3월 26일 순국할 때까지 상고(上告)도 포기한 채 뤼순(旅順) 감옥에서 마지막 생을 다 바쳐 써내려간, 안중근의 ‘혼(魂)’그 자체이다. 우리는 안의사가 남긴 옥중 유묵을 통해,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독립투사를 넘어, 좀 더 다양한 그의 생의 일면들과 마주할 수 있다. 민족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걱정했던 교육가, 문무(文武)를 겸비한 선비이자 의병장, 하늘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신앙인으로서 안중근의사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본다.

To commemorate the day of Ahn Junggeun’s death on March 26th, the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is holding a special exhibition on the newly acquired Ahn’s calligraphies, which were written during his days at Lushun Prison from February 14th when he received his death sentence, through his execution day- March 26th 1910. Ahn Junggeun renounced his appeal to a higher court and wrote these calligraphies with his last energy, thus these calligraphy works fully reflect his ‘spirit’. Through these calligraphies, we can understand last messages of the man who devoted himself to his nation as an educator, Confucian scholar, leader of the Righteous Army, as well as religious man.

신소장품

신소장품 하나New Collection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 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
'황금 백만 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 Educating a child outvalues making a fortune. 1910.3. 145.8 X 35.2 cm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고국으로 돌아온 안중근의사의 유묵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를 2016년 경매를 통해 구입하였다. 이 유묵은 안의사가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감옥 경수계장 이었던‘나카무라(中村)’가문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황금 백만 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는 내용의 글귀에서 삼흥(三興)학교, 돈의(敦義)학교 운영을 통해 교육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던 교육가로서 안중근의사의 철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일찍이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안중근은 21세 때인 1899년에 프랑스인 뮈텔(Mutel) 주교에게 대학설립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 기도 하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에 사재를 털 어 돈의학교를 인수하고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계몽운동 에 매진하였다.
신소장품 둘New Collection
지사인인 살신성인 志士仁人 殺身成仁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A man who thinks big and has virtue, sacrifices his life to do the right things. 1910.3. 149.2 X 37.8 cm 안중근의사숭모회 ‘지사인인 살신성인’은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2016년 일본인 고마쓰 료(小松亮)로부터 기증받은 것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기탁한 것이다. 이 유묵은 안의사의 공판을 취재하러 갔던 일본 고치(高知)현의 도요(土陽)신문사 통신원 고마쓰 모토코(小松元吾)가 안의사에게 받은 것으로, 그의 후손인 고마쓰 료가 가보로 보관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안의사의 재판 과정에는 고마쓰 모토코의 친구인 변호사 미즈노 키치타로(水野吉太郞), 검찰관 미조부치 타카오(溝淵孝雄)와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郞) 등 고치현 출신의 여러 인물들이 관여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도 안의사에게 유묵을 청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나라를위해옳은일을하였고이에대해한점후회도 없음을 당당하게 드러낸 글귀, 여기서 느껴지는 안의사의 곧은 기개와 결연한 의지는 재판에 관계된 일본인들까지 감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야스오카 세이시로는 그가 만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안중근을 꼽는 등 안의사에 대한 깊은 존경을 보여주었다.
우 국 憂國Concerns for the Nation
안중근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선비이자 의병장으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유묵에 담았다. ‘국가안위 노심초사(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와 ‘위국헌신 군인본분(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은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안중근의 애국심과 의병장으로서의 위엄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안중근은 29세에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 러시아령 연해주에 도착하여 의병 대열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동지들과 대한의군(大韓義軍)을 창설하고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이 되었다.
안중근은 조부와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학(儒學)을 공부한 선비이기도 했다. ‘언충신행독경 만방가행(말에 성실과 신의가 있고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비록 야만의 나라에서도 이를 따르리라)’은 수신(修身)을 통해 타인을 감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유교적 선비의 모습이 투영된 글이다. 실제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의사는 옥중에서 몸소 증명하였다. 그의 인품에 감명받은 일본인들이 앞다투어 글을 청했던 것이다. 안중근의 유묵이 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를 소중하게 보관한 일본인들의 역할도 있었다. 비록 일본인의 입장에서 적장(敵將)인 안중근이었지만, 재판 과정과 옥중에서 안의사의 언행을 보고 들었던 사람들은 그의 인품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안위 노심초사,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With all my heart and soul, I concern about the national security.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To sacrifice himself for his country is a soldier’s duty.
언충신행독경 만방가행 言忠信行篤敬 蠻邦可行 ‘말에 성실과 신의가 있고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비록 야만의 나라에서도 이를 따르리라.’ Even in a barbarous country, keep faithful and sincere in word and deed.
천 명 天命Heaven’s Will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목전에 둔 1910년 3월에 안의사는 ‘경천(敬天)’, ‘극락(極樂)’, ‘운재(雲齋)’ 등의 휘호를 남겨 하늘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냈다. 안중근은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19세 때에 부친과 본인을 비롯한 가족이 모두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인 빌렘(Wilhelm) 신부로부터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이어나갔으며,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천주교에 대한 내용이다. 사형을 앞두고도 신앙에 따라 천주교 신부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교수대로 향하기 전 수 분간 기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가 옥중에서 어머니와 아내에게 보낸 유서를 보면 장남 분도를 장차 신부가 되게 하라고 거듭 부탁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극락 極樂 Paradise 보물 제569-19호 1910.3. 33.3 X 68.0 cm 안중근의사숭모회, 운재 雲齋 Cloud Castle 보물 제569-20호 1910.3. 33.3 X 68.0 cm 안중근의사숭모회
공 판 公判Trial
안중근의사숭모회는 고마쓰 료(小松亮)로부터 안중근의사 공판 장면이 실려 있는 화첩 ‘안봉선풍경 부 만주화보’와 당시에 발부한 공판방청권도 기증받았다. 일본 도요(土陽) 신문사의 고마쓰 모토코(小松元吾)는 1910년 2월 안중근의 공판을 참관하고 그 장면을 직접 그림으로 남겼다.
안중근은 재판 과정 내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외롭게 투쟁하였다. 러시아 조차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었고 그가 한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현장에서 그를 체포하여 당일 일본 총영사관에 인계하였다. 이후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에서 일본 형법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안의사가 사형을 언도받기 70여 일 전에 이미 일본은 ‘안중근 극형’ 지령을 법원에 하달하였고, 뤼순 고등법원장은 그를 ‘사형’에 처하겠다고 회신하여 모든 재판 과정이 형식에 불과했음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불리한 상황에서도 안중근은 당당하였다. 하얼빈 의거의 목적인 동양평화와 이를 해하는 일본의 죄상을 거침없이 밝혔고, 한 치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재판을 참관한 영국 『그래픽(The Graphic)』의 모리머(Charles Morrimer)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는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 정도가 아니라 기꺼이 자신의 소중한 삶을 포기하고자 했다. 그는 영웅의 왕관을 거의 손에 넣었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안봉선풍경 부 만주화보 安奉線風景 附 滿洲畫報 Komatsu Motoko’s Sketchbook Illustrating the Trial of Ahn Junggeun 1910.2. 19.2 X 28.0 cm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재판 제4회 공판방청권 Ticket for the 4th Trial of Ahn Junggeun 1910.2. 10.2 X 7.0 cm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 어록Quotations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3월 9, 10일
뤼순 옥중에서 안중근의사 최후의 유언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동포에게 고함」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25일자
나의 의거는 오로지 동양평화를 도모하려는 성심에서 한 것이니 바라건대 오늘 임검한 일본 관헌들도 다행히 나의 미충(微衷)을 양해하여 피아(彼我) 구별없이 합심협력하여 동양평화를 기필코 도모할 것을 간절히 바란다.

1910년 3월 26일
사형집행 직전
오늘부터 의병을 계속 일으켜 큰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힘을 길러 스스로 국권을 되찾고 독립을 굳건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모든 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쓰러질 근본이 되고 능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흥할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까, 분발하고 힘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청컨대 결심하고 각성하고 깊이 생각하여 용기 있게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안응칠 역사』 중에서
무릇 문명이란 것은 동서양, 잘난이 못난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그것이라.
(중략)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눈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1909년 11월 6일
「한국인 안응칠 소회」중에서
안중근 연보Chronology
  • 1879 1세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안태훈, 조성녀(마리아)의 첫째 아들로 태어남
  • 갑신정변 - 1884 6세 해주에서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 조부 안인수가 설립한 서당에서 한학 교육을 받음
  • 1885 7세 동생 정근, 공근, 성녀 태어남
  •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 - 1894 16세 김아려와 결혼 신천의려군 선봉장으로 출전
  • 을미사변 - 1895
  • 1897 19세 빌렘(Wilhelm)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음 세례명 도마 (Thomas)
  • 을사늑약 - 1905 27세 상하이에서 만난 르 각(Le Gac) 신부의 조언으로 조선으로 돌아옴 아버지 안태훈 사망
  • 1906 28세 진남포로 이사 삼흥학교 설립 돈의학교 운영
  • 고종 강제퇴위 정미조약 (한일신협약) 정미의병 - 1907 29세 서북학회 가입 및 국채보상운동 참여 간도에서 동포의 생활을 시찰하고, 의병투쟁을 결심함 블라디보스토크로 감
  • 1908 30세 러시아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오는 국내 진공작전 실시 블라디보스토크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
  • 기유각서 - 1909 31세 2월 동의단지회 (일명 단지동맹) 결성 단지혈서 엽서 10월 19일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방면시찰소식을 들음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오전 9시 30분 경 의거 하얼빈 역에서 체포되어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조사받음 러시아, 일본 총영사관에 안중근 인계 0월 27일 외무대신 코무라 주타로가 안중근 재판이 관동도독부로 이송되었음을 통보 10월 30일 안중근 신문 시작 (1910년 2월 6일까지 검찰 11회, 통감부 13회 신문) 증인신문조서 11월 3일 안중근외9명 뤼순 감옥에 수감
  • 1910. 8. 29. 국권 피탈 - 1910 32세 2월 14일 제6회 공판, 사형 언도 월 15일 안병찬을 통하여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제목의 유언을 알림 2월 17일 『동양평화론』 집필 시작 3월 15일 자서전 『안응칠 역사』탈고 안응칠 역사 (나가사키본) 3월 24일 6통의 유언 작성 3월 26일 순국